2008년 1월 12일 토요일

OSS 정책 - 부요, 필요할까

지난 글들에 이어,

비행기 조종 실습생들은 창백해진 손으로 조정관을 꼭 움켜쥘 때가 많다. 교관들은 손에서 힘을 빼라고 가르친다. 과잉조정은 과소소정에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다. 오는날 소련 등 여러 나라의 위기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국민과 경제를 과잉통제하고자 하는 국가는 결국은 국가가 추구하는 질서 자체를 파괴하게 된다. 간섭을 적게 하는 국가가 가장 많은 것을 성취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고양시키게 될 것이다.  - 앨빈토플러, 권력이동(1992) 중에서

과거에 마이크로소프트웨어 기사 및 각종 인터뷰를 통해 말한 바에 따르면, 부요의 입안자들은 국내 OSS 산업이 활성화되지 않는 원인을 "(1) 많은 소프트웨어 중에서 선택이 어려움", "(2) 기술지원 부재", "(3) 외국 업체 선호"라고 분석했고. 그래서 배포판 표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 소비자나 기업도 이런 분석을 믿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고, 분석안을 내 놓은 정책 입안자들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배포판"이라는 결론을 내린 다음에 그럴듯한 원인을 짜깁기했겠지만, 정말로 이런 분석을 했다면 배포판을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산업 육성 정책

한국 정부는 과거부터 어떤 산업을 육성하려고 한정된 기업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제도의 정비를 통해 시장 분위기를 조성하고 보호 장벽을 만들어서 한동안 어느 정도의 수요를 보장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얼핏 듣기에는 부질없어 보이지만 정부는 매우 능숙하게 그런 경제 정책을 해 왔고 실제로 꽤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철강, 조선, 가전, 자동차, 반도체, 휴대전화 모두 그렇게 정부 주도로 시장을 만들어 내고 보호된 시장 내에서 기업을 키워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요즘에는 과거만큼 약빨이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지만.

부요라는 정책도 이 전통적인 국가 주도의 산업 육성 전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부 주도로 하나의 틀을 만들고 (리눅스 표준), 그 틀 안에서 국내 업체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표준 배포판 제작 업체), 어느 정도의 수요를 일부러 보장해서 (공공기관의 리눅스 전환 등) 업체들이 성장하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부요는 그런 면에서 아직 정책이 완성되지 않았다. "부요"의 표면에 보이는 표준 제정과 업체 지원까지는 진행되었지만, 부차적으로 기업들을 살찌우는데 필요한 "어느 정도의 수요를 일부러 보장"하는 일이 아직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진흥원의 공공기관/교육기관의 공개 소프트웨어 전환 사업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성급한 부정적인 평가도 경계해야 겠지만, 현재 하는 것처럼 언론을 통해 자화자찬식으로 정책을 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래서 부요가 수년을 끌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요에 대한 문제 제기는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된다. 첫째로 정말 이런 산업 육성 정책이 정보 산업에 효과가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고, 둘째로 이 정책때문에 오히려 성장의 방향이 왜곡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이미 개방된 시장에 장벽 쌓기
이러한 방식의 기획성 산업육성 정책은 리눅스 배포판에 적용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리눅스 배포판은 이미 다른 어떠한 시장보다도 개방되어 있다. APT와 YUM같은 업데이트 프로그램으로 무장한 리눅스 배포판 사용자들은,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만든 소프트웨어를 매일같이 다운로드하고 있다. 단지 소프트웨어를 받아보는 것뿐만 아니라 의견을 보내기도 하고, 반대로 의견을 받아서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도 하고 계속해서 교류하고 있다. "외산 리눅스"라는 말을 붙이는 게 어색할 정도로 국경의 의미가 무색하고 유통의 제약도 없다.  (만드리바는 어느나라 제품이고 수세는 어느나라 제품인지 기억도 희미하다.) 그래서 어떤 기업이든 리눅스 배포판을 만든다면 지구상의 거의 모든 배포판과 같은 위치에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기업용으로 기술지원이라든지 교육같은 이슈가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국내의 리셀러나 서비스 전문 회사와 같은 위치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다.

부요는 이러한 개방된 시장에 철지난 폐쇄적 배포판 정책을 들고 나왔다. 여타 산업 육성 정책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 부요 배포판 기업을 지원함으로써 경쟁력이 생길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야와는 다르게 리눅스 배포판에 관련해 쌓을 수 있는 장벽은 공공시장뿐이고, 다른 개인/기업 분야의 배포판은 여전히 레드햇, 노벨수세와 같은 기준에서 경쟁해야 한다.


공공 시장의 폐쇄화에 대한 우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군침을 흘리고 있는 기업도 있는 이유는 공공시장 때문이다.공공 시장의 리눅스를 위한 기준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부요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고, 또 한국 정부의 지출은 지금도 큰 편이지만, 앞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부 지출은 GDP의 20% 정도로 다른 국가와 비교해보면 아직 낮은 수치이고, 그 중에서 정보통신 관련 지출 비중은 갈수록 늘고 있다.)

먼저 공공 시장의 기준에 관해서..  그게 부요 표준이 됐든, FHS가 됐든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만약 부요가 단순한 표준과 인증으로 구성되었다면 공공기관의 기준으로서 부요에 대해 박수를 보내겠다. 하지만 실제 부요는 전에 말한 것처럼 표준인지 소프트웨어인지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운 국내 기업 밀어주기 정책으로, 부요 인증을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공공 시장의 기준이 되려는 게 목적이라면 장벽을 낮춰서, 표준도 좀 더 단순 명확하게 하고 인증도 LSB처럼 저렴한 비용으로 단순하고 명확한 검사를 통해 인증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공공 시장에 부요의 수요가 보장된다면 국내 기업 입장에선 꽤 괜찮겠지만, 일반 시장의 현실과 다른 왜곡된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민간 시장과는 다르게 유별난 공공 기관의 아래아한글 수요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부요를 계속해서 업데이트하면서 리눅스 배포판의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게 유지될 수 있을까?


인위적인 시장은 그만

최근 그놈 데스크탑은 같은 2.x 버전이면서도 수많은 인터페이스가 바뀌었다. 한국어 번역도 나 혹은 다른 번역자가 내부적으로 기준을 바꾼 것도 있고 우연히 바뀐 것도 있다. 그런데 최근에 릴리스한 그놈 데스크탑과 부요 데스크탑 2.0 표준을 비교해 보면...  최신 그놈 데스크탑을 채용하면 죄다 부요 표준에서 어긋난다! 인터페이스도 많이 바뀌었고 번역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많이 바뀌었다. 자유로운 생각에서 개발하는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기준을 만들고 재단하기 위해 그놈 인터페이스를 보면서 문서로 받아적은 결과이다. 부요를 표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매번 그놈이 릴리스할 때마다 재빠르게 표준을 개정하기라도 할 것인가, 아니면 코드나 번역을 옛날 버전으로 일부러 되돌리기라도 할 것인가?

정부주도의 산업육성 정책은 한 시장을 키울 수도 있지만, 가만히 두면 빠르든 느리든 잘 발전할 시장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발목을 잡기도 한다. 앞에서 예를 든 그놈 데스크탑의 인터페이스 변화는 작은 부분이다.  "공개SW" 지원 정책을 쓰려면 장벽을 낮추고 불공정한 제도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야지, 부요와 같은 방법으로 소프트웨어 자체를 제도적으로 만드려고 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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